
길을 걷다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익숙한 노래가 들려올 때가 있어요
지나가는 카페 스피커에서,
버스 정류장 옆 가게에서,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그 멜로디 하나에
그 사람, 그 표정, 그날의 공기가 확 밀려오죠
노래는 시간이 아니라 장소에 감정을 붙잡아두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걷는 그 길엔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조용히 남아 있어요
음악은 공간에 기억을 덧입힌다
어떤 노래는 그냥 플레이리스트에 있고
어떤 노래는… 정확한 장소에 남아 있어요
내가 걷던 거리,
그 사람과 나란히 걸었던 길,
조용히 앉아 있던 벤치 옆
그곳에 흘러나오던 노래가
지금도 그 장면을 그대로 꺼내줘요
사랑하던 시절, 혹은 그 끝
걷고 있을 땐 몰랐는데
몇 달,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하게 울컥해요
“아, 여기서 그 노래 나왔었지…”
그리고 그때 내 표정, 그 사람의 눈동자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죠
홍대 걷고 있었을 때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10cm - ‘스토커’
괜히 서로 웃고 말도 안 하면서
그 곡에 묘하게 분위기 타던 거 기억나요
그 순간이 좋았는지
그 노래가 좋았는지는 이제 잘 모르겠지만
그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아직도 속으로 흥얼거리게 돼요
또 여의도 한강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을 때
멀리서 버스킹하던 팀이 부르던
Standing Egg - ‘무지개’
우리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그 노래가 잔잔히 깔리던 그 장면,
지금도 바람만 살짝 불면 떠올라요
사람은 사라지고 관계는 변해도
그 노래는 그 장소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공간은 감정을 지우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노래와 함께
그때 그 순간을 ‘박제’해서
내 안에 조용히 보관해두는 것 같아요
감정은 시간보다 장소에 남는다
이별 후, 제일 무서운 건
그 사람과 걷던 길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걷게 될 날이 오는 거예요
그땐 정말 안 걸을 것 같았고
다신 안 가겠다고 다짐했던 곳들인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날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고요
문제는 그때예요
멀쩡히 걸어가다가
카페 앞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백예린 -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그 한 소절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거죠
‘어? 이거 우리 같이 들었던 거잖아’
하고 마음속에서 소리 없는 파도가 확 밀려와요
감정은 사실 시간보다 장소에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 감정이 흐릿해지기만 하지는 않더라고요
대신 조용히 공간 속에 숨어 있다가
비슷한 분위기, 같은 노래, 혹은 공기 냄새에
그 기억이 다시 피어오르죠
강릉 바다에서 밤에 걸었던 모래사장,
그때 들었던
이루마 - ‘River Flows in You’
그 곡을 듣기만 해도
그때 내 발밑에 파도 소리가 같이 들리는 것 같고
같이 걷던 그 사람의 손 온도까지 떠올라요
이게 꼭 슬프다는 건 아니에요
아프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그리우면서도 따뜻한 감정이에요
완전히 잊지 못했다기보다는
그 감정을 예쁘게 기억하게 된 느낌?
그래서 저는
어떤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을 일부러 기억해두기도 해요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를
언젠가 다시 돌아봤을 때
조용히 꺼내보기 위해서요
나만의 감정 지도 위에 남겨진 노래들
우리는 다들
자기만의 감정 지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어느 거리, 어느 골목, 어느 버스 창가
그 위에 각자의 감정이 얹혀 있고
그 공간마다 다른 노래가 덧칠돼 있죠
누군가와 걷던 골목에선
정준일 - ‘안아줘’
말없이 걸으면서 서로 감정 다 알아챘던 그때
그 노래는 진짜 대사 하나 없이
우리 마음 다 말해줬던 것 같아요
비 오는 날 우산 같이 쓰고 집까지 데려다주던 골목
그때 이어폰 나눠 들었던
브로콜리 너마저 - ‘앵콜요청금지’
그날은 좋았는데 왜인지 약간 쓸쓸했던
그 감정을 지금도 설명 못 하지만
그 노래를 들으면 그 골목 냄새가 떠올라요
그 사람과 끝나고 난 후
다시는 못 갈 것 같았던 연남동 골목에
우연히 다시 갔던 날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던
자우림 -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 노래는 그날 이후
‘그 사람’보다 ‘그 골목’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게 만들었어요
이런 노래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저는 가끔 플레이리스트에 ‘장소 이름’을 붙여요
“홍대 카페”, “연남동 밤 산책”, “여의도 벤치” 이런 식으로
그렇게 내 감정 지도 위에 노래들을 박아두면
그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간직할 수 있거든요
물론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 장소를 가도 감정이 무뎌질 수 있어요
하지만 노래만큼은
그때의 나를 변함없이 기억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음악은
누군가와 걷던 길을,
내가 사랑했던 감정을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주 단단하게
기억하게 해주는 존재인 것 같아요
사람은 떠났고, 시간도 흘렀지만
그 길 위에 흐르던 노래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무심히 걷다가,
조용히 들려오는 음악 한 소절에
그 시절의 나와 그 사람이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요
이젠 그 기억들이 아프기보다는
조금은 따뜻하게,
조금은 웃음 섞인 여운으로 남았어요
음악이 그렇게 만들어줬어요
잊는 대신, 잘 기억하게 해주는 방식으로요
그래서 오늘도 걷다 보면
가끔은 괜히 귀 기울이게 돼요
혹시 또,
그때 그 노래가 다시 들릴까 봐요
그리운 감정이
잠깐이나마 다시 살아날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