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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걷던 길에서 들었던 노래, 그때 감정이 박제된 장소의 기억들

by deliah 2025. 3. 27.

누군가와 걷던 길에서 들었던 노래, 그때 감정이 박제된 장소의 기억들
누군가와 걷던 길에서 들었던 노래, 그때 감정이 박제된 장소의 기억들

 

길을 걷다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익숙한 노래가 들려올 때가 있어요
지나가는 카페 스피커에서,
버스 정류장 옆 가게에서,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그 멜로디 하나에
그 사람, 그 표정, 그날의 공기가 확 밀려오죠

노래는 시간이 아니라 장소에 감정을 붙잡아두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걷는 그 길엔
아직도 그때의 감정이 조용히 남아 있어요

 

음악은 공간에 기억을 덧입힌다


어떤 노래는 그냥 플레이리스트에 있고
어떤 노래는… 정확한 장소에 남아 있어요
내가 걷던 거리,
그 사람과 나란히 걸었던 길,
조용히 앉아 있던 벤치 옆
그곳에 흘러나오던 노래가
지금도 그 장면을 그대로 꺼내줘요

사랑하던 시절, 혹은 그 끝
걷고 있을 땐 몰랐는데
몇 달,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하게 울컥해요
“아, 여기서 그 노래 나왔었지…”
그리고 그때 내 표정, 그 사람의 눈동자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죠

홍대 걷고 있었을 때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10cm - ‘스토커’
괜히 서로 웃고 말도 안 하면서
그 곡에 묘하게 분위기 타던 거 기억나요
그 순간이 좋았는지
그 노래가 좋았는지는 이제 잘 모르겠지만
그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아직도 속으로 흥얼거리게 돼요

또 여의도 한강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을 때
멀리서 버스킹하던 팀이 부르던
Standing Egg - ‘무지개’
우리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
그 노래가 잔잔히 깔리던 그 장면,
지금도 바람만 살짝 불면 떠올라요

사람은 사라지고 관계는 변해도
그 노래는 그 장소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공간은 감정을 지우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노래와 함께
그때 그 순간을 ‘박제’해서
내 안에 조용히 보관해두는 것 같아요

 

감정은 시간보다 장소에 남는다


이별 후, 제일 무서운 건
그 사람과 걷던 길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걷게 될 날이 오는 거예요
그땐 정말 안 걸을 것 같았고
다신 안 가겠다고 다짐했던 곳들인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날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고요

문제는 그때예요
멀쩡히 걸어가다가
카페 앞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백예린 -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그 한 소절에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거죠
‘어? 이거 우리 같이 들었던 거잖아’
하고 마음속에서 소리 없는 파도가 확 밀려와요

감정은 사실 시간보다 장소에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 감정이 흐릿해지기만 하지는 않더라고요
대신 조용히 공간 속에 숨어 있다가
비슷한 분위기, 같은 노래, 혹은 공기 냄새에
그 기억이 다시 피어오르죠

강릉 바다에서 밤에 걸었던 모래사장,
그때 들었던
이루마 - ‘River Flows in You’
그 곡을 듣기만 해도
그때 내 발밑에 파도 소리가 같이 들리는 것 같고
같이 걷던 그 사람의 손 온도까지 떠올라요

이게 꼭 슬프다는 건 아니에요
아프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그리우면서도 따뜻한 감정이에요
완전히 잊지 못했다기보다는
그 감정을 예쁘게 기억하게 된 느낌?

그래서 저는
어떤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을 일부러 기억해두기도 해요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를
언젠가 다시 돌아봤을 때
조용히 꺼내보기 위해서요

 

나만의 감정 지도 위에 남겨진 노래들


우리는 다들
자기만의 감정 지도를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어느 거리, 어느 골목, 어느 버스 창가
그 위에 각자의 감정이 얹혀 있고
그 공간마다 다른 노래가 덧칠돼 있죠

누군가와 걷던 골목에선
정준일 - ‘안아줘’
말없이 걸으면서 서로 감정 다 알아챘던 그때
그 노래는 진짜 대사 하나 없이
우리 마음 다 말해줬던 것 같아요

비 오는 날 우산 같이 쓰고 집까지 데려다주던 골목
그때 이어폰 나눠 들었던
브로콜리 너마저 - ‘앵콜요청금지’
그날은 좋았는데 왜인지 약간 쓸쓸했던
그 감정을 지금도 설명 못 하지만
그 노래를 들으면 그 골목 냄새가 떠올라요

그 사람과 끝나고 난 후
다시는 못 갈 것 같았던 연남동 골목에
우연히 다시 갔던 날
카페 안에서 흘러나오던
자우림 -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 노래는 그날 이후
‘그 사람’보다 ‘그 골목’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게 만들었어요

이런 노래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저는 가끔 플레이리스트에 ‘장소 이름’을 붙여요
“홍대 카페”, “연남동 밤 산책”, “여의도 벤치” 이런 식으로
그렇게 내 감정 지도 위에 노래들을 박아두면
그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간직할 수 있거든요

물론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 장소를 가도 감정이 무뎌질 수 있어요
하지만 노래만큼은
그때의 나를 변함없이 기억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음악은
누군가와 걷던 길을,
내가 사랑했던 감정을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주 단단하게
기억하게 해주는 존재인 것 같아요

 

사람은 떠났고, 시간도 흘렀지만
그 길 위에 흐르던 노래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무심히 걷다가,
조용히 들려오는 음악 한 소절에
그 시절의 나와 그 사람이 다시 떠오르는 것처럼요

이젠 그 기억들이 아프기보다는
조금은 따뜻하게,
조금은 웃음 섞인 여운으로 남았어요
음악이 그렇게 만들어줬어요
잊는 대신, 잘 기억하게 해주는 방식으로요

그래서 오늘도 걷다 보면
가끔은 괜히 귀 기울이게 돼요
혹시 또,
그때 그 노래가 다시 들릴까 봐요
그리운 감정이
잠깐이나마 다시 살아날까 봐요.